인천의 한 초등학교 야간 경비원 박모(70·가명)씨는 요즘 학교에 나가는 게 두렵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자녀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고 지난 5월 어렵게 구한 일자리이지만 나이 70에 감당해야 하는 노동의 강도가 버겁기 때문이다.
학교 전문관리업체에 '당직 기사'로 채용된 박씨는 담당 학교로 오후 5시 출근해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외부인의 무단침입을 감시하고 학교 시설을 지키는 게 기본 업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교 안 배수로 청소는 물론 기계실 바닥 물 퍼내기, 체육관 커튼 세탁, 지하주차장 물청소, 제초작업, 쓰레기 분류, 페인트칠 등 본연의 경비업무와 관련 없는 온갖 노동을 해야 한다.
박씨는 18일 "한개에 15㎏짜리 철판 덮개 수십개를 들어내고 배수로를 청소하거나 새벽 두시까지 세탁기를 돌리고 있으면 억울한 마음이 들지만 이 나이에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학교에 배치된 관리업체 직원의 지시에 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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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60대 경비원과 주말·휴일까지 맞교대 근무를 하는 박씨가 매월 손에 쥐는월급은 103만원.
시도 때도 없는 노동을 견디다 못한 박씨는 경비 업무 이외의 업무 지시에 항의하다가 회사 측과 마찰을 빚게 됐고 업무 지시 불이행, 무단결근, 회사 명예 손상 등의 사유로 회사 징계위원회에 부쳐졌다.
박씨의 딸은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뒤늦게 알고 국민권익위원회와 교육부 등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박씨의 딸은 관계기관에 제기한 민원서에서 "아버지가 초등학교 야간 경비원으로서 업무 외의 일을 노예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면서 "힘없는 노인들이 학교 울타리 안에서 부당노동행위에 고통받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씨 부녀의 이런 주장에 대해 학교 관리업체 측은 "아파트 경비원과 마찬가지로 학교의 야간 경비원도 청소를 비롯한 환경 미화 업무에서 완전히 빠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 "박씨가 학교 안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한 것은 맞지만 한번에 20∼30분 정도씩 학교에 고정 배치된 관리업체 직원을 돕는 수준이었다"고 해명했다.
인천시교육청은 박씨 측의 민원이 제기되자 진상 파악에 나서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고 16일 해당 학교의 BTL(임대형 민자사업) 시행사에 시정을 지시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교내 CCTV 기록과 당직근무일지 등을 통해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는 점은 파악했지만 철제 덮개를 들어내는 배수로 청소 등 가혹한 중노동이 있었는지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CCTV 기록이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교육청은 직영 학교와 달리 전문업체가 관리하는 인천의 BTL 학교 35곳에서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 점검할 예정이다.
교육청이 학교 관리업체를 직접 상대할 수는 없지만 BTL 학교 시행에 대해 '경비업법'과 시설사용자의 권한으로 시정 조치를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학교 노예' 논란이 불거진 초등학교 교장은 "BTL 사업 구조에서 학교 측이 전문관리업체의 시설 관리 업무에 일일이 관여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씨의 딸은 "학교 측을 비롯한 교육 당국이 교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감독하면 상당수가 고령인 야간 경비원들이 업무 외의 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BTL 사업은 민간투자자(시행사)가 학교 건물을 지어 교육청으로 소유권을 넘기고 20년간 운영하면서 교육청으로부터 연간 10억원가량의 임대료·운영비를 받는 방식이다.
민간업체가 시설 운영을 책임지면서 학교는 시설 행정업무가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만 교육재정에 장기 채무부담이 가중되는 문제점 등이 제기돼 인천에서는 2011년 이후 BTL 방식으로 추진된 학교가 없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