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신장은 171㎝, 몸무게 69㎏, 가슴둘레는 90㎝, 푸른 하늘을 몹시 좋아하는 머슴애입니다. 저의 취미는 음악감상과 여행입니다. 끝내 한 가지 더 든다면 시 감상을 좋아합니다…"
1965년 10월 어느 날 이화여대 학보사에 도착한 편지. 서울 S대학교 법정대학 졸업생이라고 밝힌 필자는 졸업 후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군대에 갔다. 입대 후 처음으로 여성에게 보낸 편지라며 '여자친구를 구해달라'는 연서였다. 청춘은 당당했지만, 또 쑥스러웠다.
(연합)
4일 이화여대가 공개한 1965년 10월 11일 이대학보를 보면 학보사에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20여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이 가운데는 기사 의뢰서, 외부 원고투고 등도 있었지만 애인을 구해달라는 노골적인 부탁 편지, 외로운 마음을 절절히 고백하면서 꽃잎과 함께 부쳐온 은근한 연서도 있었다.
군부독재와 산업화, 민주화를 잇달아 겪었던 격변의 시대에도 사랑과 연애는 여전히 젊음의 화두였다. 1960∼80년대 그때 그 시절, 아날로그 세대 청춘의 연애는 어땠을까?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전화번호부터 묻는 건 너무 노골적인 일이었다. 자취방에 전화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렇다고 매번 하숙집 아주머니께 전화해 '아무개 바꿔달라'고 부탁하기에도 민망스러웠다.
대신 학보가 청춘남녀의 마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됐다. 학보 1면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곱게 접어 흰띠로 둘렀다. 띠지 안쪽에는 점찍은 이성에게 편지를 썼다.
마지막으로 겉면에 '○○대학교 ○○과 ○○○ 앞'이라고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뒤 과 사무실로 부치면 호감을 무사히 표현한 것이다.
주 1회 발행되는 학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편지를 써서 부치고 답장까지 받으면 족히 1∼2주는 걸렸다. 그대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신호를 주고받는 데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기다림은 설렘이기도 했다.
87학번으로 대학을 다닌 김가연씨는 "과 사무실에서 내 앞으로 온 학보편지를 확인하던 순간의 설레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며 "이성에게 받은 학보 편지가 몇 개인지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은근한 경쟁거리였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까지는 무선호출기 '삐삐'도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연락수단이 귀했던 때 서울대 '녹두서점', 연대 '독수리다방', 이대 '그린하우스' 등 학교 근처 명소는 게시판 역할을 했다.
'○○씨 ○시까지 ○○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등 벽면에 가득한 메모를 보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요즘으로 치면 SNS '단체방'의 아날로그 버전인 셈이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