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면 좋아. 그 머리 좋은 사람이 갔는데 어떻게 안 억울하겠어."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 마광수(1951∼2017)의 누나 조재풍 씨는 오후 8시께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도착하자마자 오열했다. 경찰 조사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조 씨는 필화 사건 이후 고인의 고통에 대해 "다 지난 얘기 하면 뭘 하겠느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명세와 달리 빈소는 쓸쓸한 편이었다. 문학계 인사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인은 주류 문단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판하며 담을 쌓고 지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고인의 제자인 소설가 김별아가 대학 동기들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8월 초에 마지막으로 통화했어요. 졸업 25주년 기념 모임을 하면서 찾아뵈려고 했어요. 그때 이미 많이 편찮으셨던 것 같아요. '이도 많이 빠지고 추한 꼴 보여주기 싫다'면서 거절하셨어요."
김 작가는 "문학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한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며 "자유주의자였고, 방식의 차이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선을 비판한 분"이라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이후 문학계는 고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도 어려웠다. 올해 초 '마광수 시선'을 출간한 출판사 페이퍼로드의 최용범 대표는 주류 문단을 향해 "그게 진보냐. 패거리 주의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선집을 내면서 해설을 해줄 문학평론가도 찾지 못했다. 다들 눈치를 봤다고 했다. 고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했다.
최 대표는 "야한 소설보다 에세이가 마광수의 진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포리즘과 주역에 대한 책을 내보자고 전화로 이야기한 게 지난달이다. 그는 월간 사회평론에서 일하던 1990년대 고인의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연재를 담당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촌동 아파트에 찾아가서 원고를 받을 때였어요. 갈 때마다 1∼2만 원씩 택시비 하라고 쥐여주셨어요. 정년퇴임을 하시곤 집에만 계시니까 나가서 운동도 좀 하시라고 했어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면서 마지막 시집에도 의욕을 보이셨는데…."
마광수의 연세대 제자인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외롭고 힘드셨던 일들 잊으시고 그곳에서 자유로운 예술을 하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족은 7일 오전 11시 30분 영결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