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을 골라내라'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으니 통역해달라'고 소리를 지르자마자 자경단이 일본도를 내리쳤다."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한 후 도쿄 일대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조선인 학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신창범(愼昌範) 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이다.
(123rf)
93년 전 벌어진 간토 대학살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이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7) 일반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가 1일 펴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겐다이쇼칸)에 오롯이 담겼다.
간토대학살 진상규명에 헌신해 온 니시자키 이사는 일본 각지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모은 학살 관련 증언 1천100개를 500여 쪽의 책으로 엮었다.
이 책에 따르면 대지진 당시 11살이던 시노하라 교코(篠原京子)는 "'고국에 아 내가 있고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요"라고 서툰 일본어로 끊임없이 사죄하던 조선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이후 잔인한 살해장면을 목격했다.
시노하라는 "남자 4∼5명이 (반죽음이 된) 조선인의 손과 발이 장작불 위에서 큰대(大)자가 돼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서 아래쪽부터 태우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책에는 창작 동요 '반달'로 유명한 음악가 윤극영(1903∼1988)의 증언도 담겨 있다.
당시 도쿄음악대학의 전신인 동양음악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윤극영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일본인을 죽인다",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조선인을 내쫓아라' 등의 벽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일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추할 수 있는 경험담도 있다.
작가인 사다 이네코(佐多稻子)는 "남동생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나에게 소방대가 지니고 다니는 쇠갈고리가 달린 막대 1개를 쥐여줬다. (중략) 동생은 이것을 나의 호신용으로, 그것도 조선인에 대한 호신용으로 쥐여준 것이다"고 지진 당일의 일을 전했다.
그는 주변에서 온갖 조선인 소동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날 밤 불안하게 쇠갈고리가 달린 막대를 안고 땅바닥에 앉아 보냈다"고 설명했다.
사이토 시즈히로(齊藤靜弘)는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두 다리를 붙들린 채 끌려가다가 다리 가운데 도착하자 여러 명이 그를 강에 던졌다고 1923년 9월 3일 목격한 것을 기록했다.
사이토는 "(남자는) 일단 가라앉았다가 흔들흔들 수면에 떠오르자 강기슭을 향해 헤엄쳤다. 그러자 다리 위에서 보고 있던 무리가 남자가 헤엄쳐 도착하는 방향으로 달려가 (중략) 남자의 머리를 쇠갈고리가 달린 긴 막대로 마구 때렸기 때문에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인 소동의 결과일 것"고 추정했다.
니시자키 씨의 책은 일기장이나, 가족사 서적, 신문기사, 자서전 등에 흩어진 자료 토대로 제작됐으며 이 가운데 그가 과거에 직접 청취해 소책자로 소개했던 증언도 포함됐다.
그는 많은 증언 덕분에 "간토대지진 때 학살 사건의 일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며 더 많은 증언을 수집할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규모 7.9의 대지진(간토대지진)이 도쿄 등 간토 지방을 강타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다수 살해된 사건이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됐으며 조선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한 가운데 일본인 자경단, 경찰, 군인이 학살을 주도했다.
학살된 희생자는 6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진상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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