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 Sept. 6, 2014 - 19:3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보다, 학점 우수자가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일류 직장”에 취직해 고액 연봉을 받는다는 믿음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시대다.
그러나 “천재들의 학창시절 (Genius in the School)”의 저자 게르하르트 프라우제에 따르면 수많은 천재들, 역사를 주도한 위인들 중에는 낙제생들도 많았다. 독일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인 프라우제가 소개한 “낙제생 천재들”은 이르든 늦든 자신의 꿈과 재능을 깨닫고, 주위의 반대와 불리한 현실적 조건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그처럼 학교에서 밑바닥 성적을 거두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일방적권위에 의한 부자유 또는 구속에 대한 반발”이라는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강제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든 벗어나려고 한 시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가 싫은 학생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꾀병을 부리거나, 대놓고 교권에 반항을 하거나, 혹은 학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학생들의 이유 있는 반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기 보다는, 학교생활을 어려워했던 천재들의 사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유별나게 좋아하던 하던 분야에 끝까지 독하게 파고듦으로써 결국 불세출의 위인이 될 수 있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독일의 유대계 이론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1916년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 당대의 물리학계를 파격적으로 뒤흔든 인물이다. 1933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미국은 매년 탁월한 과학자 2명을 선정해, 아인슈타인상을 시상하고 있다.)
사실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은 빈 말로도 천재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발육이 더디고 말도 늦었다. 부모는 아들이 지진아가 아닐까 걱정을 했지만,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하고 달리기, 뜀뛰기 등 신체적으로 힘든 일을 싫어하는 극도로 유유자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만 전기제품 사업을 운영했지만 납품처를 거의 찾지 못해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위키미디어)
이윽고 11세가 되어 김나지움 (독일의 9년제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선생들은 장교 같았다. 학교는 내 즐거움과 거룩한 호기심을 질식시켰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 먹이를 먹으라고 채찍질로 강요당한다면 건강한 맹수조차 식욕을 잃을 것이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먹이를 던져준다 해도 전혀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문학과 산수는 월등하게 우수했으나, 싫어하던 언어와 역사는 공부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아 성적이 밑바닥이었고, 교사들에게도 미움을 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탈출하기 위해 의사를 아버지로 둔 친구에게 부탁해 가짜 진단서를 준비했다. 자율신경 이상으로 인해 학교를 6개월간 휴학하고 이탈리아에 있는 부모 곁에서 요양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들을 속이고 학교를 떠나기 전, 아인슈타인은 미리 수학선생에게 자신의 우수한 수학 성적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수학 및 과학 분야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데 유용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 외 거의 모든 과목에 잼병이었던 그는 우수 공과대학인 스위스의 연방기술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아인슈타인의 특급 수학 실력을 아까워한 학장은 그를 특별히 불러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를 다시 하고 오라고 조언했다. 결국 그는 다른 학교에 들어가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고 나서야 연방기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2. 앙드레 지드 (Andre Gide 1869-1951)(20세기 초반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지드는 “좁은 문”, “전원 교향악”, “보리 한 알이 죽지 않는다면” 등 수많은 불멸의 대작을 남겼고,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당대 유럽 문학계의 거장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된 인물이다. 불행했던 학창시절에도 불구, 19세부터 열성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쳤다.)
아인슈타인이 강압적인 교칙과 교사를 증오해 학교를 싫어했다면, 지드는 병약한 몸과 동급생들의 따돌림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프랑스 파리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남몰래 자위를 하다가 들켜서 부모님이 학교로 호출되기도 하고, 결국 이 습관을 고치지 못해 10세에 퇴학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일년 만에 세상을 떴다.
전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 수업 때 동급생들 앞에서 시낭송을 하
앙드레 지드 (위키미디어)
게 되었는데, 운율과 감정을 살려 훌륭하게 시를 낭송했다. 선생은 지드를 칭찬했지만, 동급생들은 지드가 잘난 척을 한다며 따돌렸다.
“어리석게도 시낭송을 잘해서 반 친구들이 내게 적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내 곁에 있던 아이조차 등을 돌렸다. 아이들은 내가 나약하다는 걸 알고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때로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기도 했다. 멍한 눈으로, 온통 더러워진 얼굴에 코피를 흘리며 이가 흔들리고 옷은 찢긴 채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셨다.”
등교하기가 너무 싫었던 지드는 몸이 아플 때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몸이 회복되면 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지드는, 기절한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연기에 어른들이 속아넘어가자, 지드는 등교하기 싫을 때마다 기절한 척을 했다. 양심의 가책이 있었지만, 등교에 대한 불안감은 그보다 훨씬 컸다.
“첫 번째 시도가 놀랍게도 성공을 거두자 용기를 얻었다. 나는 더 노련하게, 그리고 창의력을 발휘해서 다른 발작으로 연기를 보완했다.” 지드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기절 연기가 매번 성공하면서 지드는 학교에 가는 날이 많지 않았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게 되었다.
7년이 지나 그는 일찍이 자신을 퇴학시켰던 파리의 학교에 다시 들어갔지만,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다만 이 때 열심히 문학활동을 하는 몇몇의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되어 이들과 어울리며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20세에 학사 학위를 받고, 2년 뒤 그의 첫번째 작품인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를 출간했는데, 사실 이 데뷔작은 그가 기절한 척 연기하며 등교를 거부하던 중등학교 초기에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3.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1874-1965)
(영국의 ‘철혈 수상’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에 영국의 기둥이 되어준 인물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그 후 수상 겸 국방장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50년간에 걸쳐 정치계를 좌지우지하고, 문학적 재능마저 뛰어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집필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은 1874년 영국 옥스퍼드셔 주의 한 무도회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만삭의 몸을 이끌고 기어이 무도회장을 찾았다가 진통이 와서 결국 무도회장의 물품보관소에서 처칠을 낳았다.
윈스턴 처칠 (위키미디어)
처칠은 7세부터 “전국에서 수업료가 가장 비싸고 호화로운 학교”였던 명문 기숙사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학교를 끔찍하게 싫어했으며 평생 학창생활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다.
“가혹한 처벌은 국가 교도소에서 견뎌내야 하는 그 모든 수준을 능가할 정도였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그런 끔찍한 기억의 원인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매달 한두 번 규칙적으로 전교생을 도서관에 불러모았다. 그런 다음 태만한 상급반 학생들을 옆방으로 끌고 가 피가 나도록 때렸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들이 내는 비명을 들으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처칠도 여러 번 매질을 당했지만, 강압적인 학교에 죽기 살기로 반항했다. 어떤 날은 항의의 표시로교장 선생님의 밀짚모자를 발로 밟아 짓이겼다. “선생님들은 주로 강제수단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내게는 소용이 없었다. 나의 흥미나 생각 또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아니,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닌 12년동안, 그 누구도 내게 라틴어 한 문장조차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부작용은 신체적 이상으로도 이어졌다. 어린 처칠은 혀 짧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말을 더듬더니 2년 뒤에는 툭하면 픽픽 쓰러져버렸다. 그제야 부모는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는 전학 간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영원한 낙제생이 되어버렸다.
처칠의 아버지는 학점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지만, 처칠은 첫 입학시험에서 389명 중 거의 꼴찌를 하면서 화려하게 낙방했다. 재수를 해서 같은 곳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203등을 해서 또다시 떨어졌다. 삼수를 하고 95등을 해서 겨우 3년만에 입시에 성공했다.
저자에 따르면 처칠이 삼수도 마다 않고 사관학교에 매달린 것은 그의 어릴 적부터의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사 과목은 처칠에게 잘 맞았고,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150명의 사관생도 가운데 8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처칠은 군인이 되었고, 작문 실력이 뛰어나 신문기자로도 활약했다. 남아프리카에 종군기자로 취재를 갔다가 적군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용감하게 탈출에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약 국민스타가 되었고, 26세에 국회의원이 되어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체육과 라틴어를 죽기 살기로 싫어하고, 다른 과목들조차 줄줄이 낙제를 했던 그가 세계2차대전이라는 난세에 영국을 진두지휘해 승리로 이끈 리더로 부활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만일 그가 삼수를 거쳐 사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눈여겨보라고 강조한다.
4. 베르톨도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989-1956)(독일 극작가이자 사회주의 문학의 거장인 프레히트는 “소격효과”, “서사극 이론”들을 연극연출에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위생병으로 육군병원에서 근무한 후 반전적, 비사회적 경향을 드러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극문학의 아이콘으로, 저서 “서푼짜리 오페라”, “어머니”, “갈릴레이의 생애”,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파리 코뮌의 나날”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브레히트는 학교라는 체제에 대해 경멸을 서슴지 않았으며, 긍정적인 말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관적으로 학교를 싫어했다. 그는 학교를 “획일화된 인간을 찍어내는 통조림 공장과도 같았다”며 “선생님들은 지치지도 않고 한가로움과 독립성을 지향하는 내 감각을 망가뜨리려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용감해졌고 내 취향과 개성은 단단해졌다”고 회상했다.
베르톨도 브레히트 (위키미디어)
저자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학창시절에도 반부르주아적이고 독립적인 사유를 외치며 용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7세 때 학교에서 “조국을 위해서 죽는 것은 아름답고 명예스러운 일이다”라는 주제에 대해 작문을 쓴 일이 있는데, 그가 학교에 제출한 작문 때문에 징계위원회가 소집됐다.
그는 논문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름답고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말은 한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선전문구일 뿐이다. 침상에서든 전장에서든 목숨을 버리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죽음이다. 머리통이 빈 멍청이들이나 죽음의 문으로 용감하게 뛰어들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사실 이런 구호는 죽음의 순간이 멀리 있다고 느낄 때에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저승사자가 코앞에 다가오면 그 멍청이들도 방패를 등에 지고 도망친다. 옛 제국의 뚱뚱한 궁정광대가 빌립보에서 그랬듯이.”
이 작문으로 브레히트는 퇴학 위기해 처했으나, 한 선생이 나서서 이 글이 문제가 된 것은 그저 “혼란스러운 학생의 머리탓”이라며 퇴학에 반대해 간신히 퇴학을 면했다.
그런데 이 선생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브레히트는 상급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한 시험에서도 점수가 저조해, 유급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그는 자신의 시험답안에 틀린 표시를 몇 개 더한 뒤 선생을 찾아가 답안지를 들이대며 “이게 왜 틀렸냐”고 큰 소리로 따졌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당황한 선생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더해진 틀린 표시의 개수만큼 점수를 올려주었다. 그렇게 브레히트는 유급을 면했고, 몇 년 뒤 대학에 합격해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을 쉽사리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안 가 그는 의학 공부를 때려치우고 극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독일을 대표하는 극작가 중 한 명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5. 토마스 앨바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1931) (미국의 천재 발명가로, 철도 전신기자를 거쳐 전신국에서 근무하였으며 훗날 자신의 연구소를 만들었다. 형편없는 학력에도 불구하고 전화기를 실용화하였으며 축음기, 탄소 마이크로폰, 백열 전구, 영사기 등 현대인들의 필수품의 전신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발명해내며 당대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고 혁신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에디슨은 학교를 너무나 싫어해서 입학 3개월만에 뛰쳐나왔는데, 그 후 한번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미국에 의무교육제도가 법으로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 어린 에디슨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하겠다.
훗날 그는 “나는 학교생활을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아버지도 나를 멍청한 아이로 여긴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토마스 에디슨 (위키미디어)
입학한지 3개월 되던 즈음, 선생님이 수업 중에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에디슨을 멍청이라고 불렀다. 크나큰 충격을 받은 8세의 에디슨은 그 길로 교실을 박차고 나와 곧장 집으로 달려갔고, 어머니는 아들을 믿어주며 읽기, 쓰기, 셈하기 등 공부를 직접 가르쳤다. 에디슨은 그가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일등 공신으로 어머니를 꼽았으며 평생 감사하며 살았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독서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었는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데이빗 흄의 “영국사”를 비롯한 역사서를 건네주고, 셰익스피어에서 디킨슨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 작품들을 함께 읽었다. 그러다 리처드 그린 파커의 “자연과학과 실험과학 입문”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에디슨은 이상하리만치 열정적인 실험정신이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책에 나와있는 실험들을 모두 직접 실행해보고, 이후에도 물리학과 화학 관련 책들을 파고들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지하실에 자기만의 실험실을 차려 대부분의 놀이 시간을 실험을 하며 보냈다. 학교를 다니던 또래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유년기를 보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에디슨은 연구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12세에 철도회사에 취직해, 차내에서 과일이나 견과류, 사탕, 신문을 팔았다. 매일 꼭두새벽에 출근해 3시간 정도 차내 판매를 하고, 이웃도시에 기차가 정차한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일을 하더라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15세가 되자 차내 음식 판매를 그만두고, 고물상에서 낡은 인쇄기와 활자들을 산 뒤 자신이 타고 다니던 기차의 화물칸 한 량을 얻어 자신만의 인쇄소를 차렸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 기사를 쓰고 인쇄해서 만든 신문을 열차 안과 노선의 역에서 팔았는데, 여기에는 철도회사의 공고와 열차시간, 그리고 간간이 정치적인 소식도 실렸다.
그 후 철도 사환을 그만두고 전신기사 자리를 얻어 전신국에서 일하게 된 에디슨은, 쥐가 넘쳐나던 사물실에 놓을 쥐덫을 발명해 직장 동료들과 상사들을 놀라게 했다. 불리된 2개의 철판 사이를 배터리로 연결한 장치로, 쥐가 한 쪽 판에 두 발을 대고 다른 판에 다른 두 발이 닿기만 하면 끝장이었다.
그 후 에디슨은 달리는 증기차 마냥 새로운 발명들을 쏟아냈다.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된 발명 특허는 약 2,500개에 이른다. 탄소 마이크로폰을 고안해 알렉산더 벨이 발명한 전화를 실용화했고, 탄소섬유를 이용해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1882년 미국 뉴욕에 세계 최초의 공식 발전기를 가동시켰으며,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해 영화기술 분야에 혁신을 일으켰다.
저자에 따르면 학교를 3개월밖에 다니지 못했고, 그마저도 성적이 좋지 않았던 에디슨은 “학습속도가 느려 19살이 되어서까지 쉼표와 마침표 없이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그의 전 생애로 보면 구두점과 맞춤법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결코 되지 않았다.”
[코리아헤럴드 =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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